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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 네가 깐도리구나

일상 여행 가

by 지담티 2023. 11. 2.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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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가래, 기침에 지독한 근육통. 거기에 혀에 생긴 바늘까지. 꼭 이렇게 몇 년에 한 번은 거르지 않고 찾아옵니다. 그러는 동안 한여름에 옆 동네로 이사 온 40년 지기 친구는 대상 포진이 왔다 가는 중이라네요. 너도 나도 그렇게 겨울채비 하는구나 했어요. 그렇게 6일 만인, 어제 처음으로 동네 몇 바퀴 걸으러 나갔어요. 아내도 타닥이도 함께.

 

 

집에 있는 화분들만 신경 쓰고 있느라 가을이 이렇게 수북해졌는지 몰랐네요. 골목골목에 할로겐 등 아래 주광색 불빛 아래 단풍잎, 은행잎, 낙엽활엽수들이 수북이, 수북이 쌓여있어요. 일부러 치우지 않아서 눈으로만 보는 나는 더 따듯하고 좋았네요. 폭신한 잎들 위를 걸으면서 마킹하는 타닥이는 엉덩이만 봐도 신나, 신나. 

 

그렇게 동네를 한 바퀴만 돌려다 두 바퀴째는 길을 바꿔서 옆 길로 걸었네요. 타닥이는 이 길을 싫어해요. 가다가 그냥 멈춰 엉덩이부터 땅에 내려놔요. 언제부턴가 그래요.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보지만 속 시원한 이유는 모르겠네요. 그러다 조금 방심(?)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반대편 숲길을 보고 뛰어요. 어제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쁜 이 길을 포기하고 타닥이를 따라 황톳길 옆 숲길로 들어섰네요. 여기도, 저기도 수북한 낙엽. 그 위에서 열심히 마킹하는 타닥이는 황홀경에 빠져 있어요. 응아도 시원하게 하고. 착하게도, 고맙게도 낙엽 위에 소복하게. 낙엽덕에 요즘에는 응아 치우기가 훨씬 수월하거든요. 

 

묵직한 검은색 배변봉투를 손에 쥐고 몇 걸음 앞서가던 아내가 갑작 환호성을 질러요. 옆에서 맨발로 걷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볼 정도로 짧고 크게. 그리고는 쓸어 모아 놓은 수북한 낙엽더미를 내려다보면서 그래요, 자기야, 자기야, 이거 봐, 이거. 깐. 도. 리. 다, 깐. 도. 리.

 

아내는 길 가다 우연히 40여 년 만에 친구를 본 것 같았어요. 커진 눈도, 쏙 들어간 보조개도, 입꼬리도 동시에 그렇게 웃고 있었어요. 심지어는 어머나 하듯 들어올 린 양손, 가락 사이에 걸려 있는 축 늘어진 배변봉투까지 기분 좋게 흔들흔들하면서 말이죠.

 

뭐, 깐도리? 하면서 가을 낙엽 노즈워킹 삼매경에 빠진 타닥이를 재촉하면서 아내가 내려다보는 나무그루터기 옆으로 가봤어요. 누군가가 먹고 휙 버린 뜯긴 포장지에 선명하게 깐. 도. 리.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로 우리 둘 다 열두 살로 데리고 가더군요. 하얀 운동복 소매 끝에 꼬질꼬질 묻어 있던 팥물까지(이건 내 소매 끝. 열두 살 아내껀 본 적이 없으니)

 

그때부터 아내는 갑자기 탐정 모드로 변신. 저기서 걸어오면서 이 길을 걸으면서 먹었을 거야, 여기에 버린 걸 보면, 찢어진 상태를 보니까, 어제 아니고 오늘 그것도 저녁 무렵이야. 아무리 늦어도. 포장지가 전혀 이슬도, 먼지도 묻어 있지 않잖아, 흠. 분명 이 근처 거주자가 이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구입한 후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버리고 먹으면서 걸어간 거지. 

 

마치 형사가 주차된 차 보넷 위에 손등을 올려놓고 흠, 방금 세웠군 하는 것 같았어요. 나도 타닥이도 엄마를 한참 쳐다봤어요. 아주 잘해서. 아내는 유명한, 아주 아주 유명한 드라마 작가와 본명이 같습니다. 동명이인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는 자주 코스프... 하는 경우라 익숙은 해요. 농담으로 자기도 좀 쓰지, 쓰지 하지만 이 말만 따라주지 않지만요.

 

그렇게 우리의 산책은 동네 두 바퀴를 넘기면서 아이스크림 가게 투어가 되었네요. 다행히 세 번째 아이스크림 매장에 직접 들어가 깐. 도. 리 무리를 발견한 아내는 평소와는 다르게 사진을 마구마구 찍더군요. 그리고는 깐도리 횃불을 만들어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너는 동안 나와 타닥이 앞에서 개선장군이 되어 앞서갔어요. 빰빰빠밤빠 빠바바바바~ 입으로 소리까지 내면서.  

 

 

동네 몇 바퀴 돌면서 가볍게 40년을 왔다 갔다 하는 아내를 보면서 가을이 더 이뻐졌습니다. 네 계절 중 가을만큼 내 인생의 타임리스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때가 없지 싶어 져서 더욱이요. 그렇게 잠깐 어린 나, 그때의 나, 내 갤러리 속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갔다 오면, 지금이 훨씬 더 진해지고, 향긋해지니까요. 

 

맛도 여전해서 아내의 가을이 횃불처럼 더 활활 타오르기를 빌 새도 없이 사르르 혀 위에서 녹았네요. 40년 전의 맛을 기억하는 신비한 인체 탐험으로 1시간 남짓한 타임리스 산책, 참 고마워요. 깐. 도. 리를 마구 그냥 바닥에 버린 그 사람도 그냥, 고마워요. 다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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