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개최지였던 휘슬러를 출발한 건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다음 목적지는 조프리 레이크 파크. 조프리 일대가 전부 빙하에 의해 형성된 크고 작은 빙하호 지역. 그중 트래킹 코스를 따라 세 개의 조프리 레이크가 이어진다. 그중 우리 일행은 시간 관계상 가장 아래에 위치한 Lower Joffre lake에 가기로 하고 출발했다. 남은 연료는 185km라는 계기판을 보면서. 휘슬러에서 북쪽으로 1시간 조금 더 달려 자갈이 깔린 자그마한 조프리 레이크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허리를 좀 펴는데 따님이 외친다. 아, 여기 노 서비스 No service라고 뜨는데, 하고. 그래서 다들 자기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다를 리 없다. 전부 다 같은 통신사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정표를 보니 가장 아래에 있는 호수는 주차장에서 불과 5분여 거리였다.
정말 숲 속으로 채 5분도 걸어 들어가지 않았는데 거대한 나무 기둥 사이로 코발트 빛 호수가 쪼개져 보였다. 얘들아, 호수야. 그랬더니 조카와 따님은 발걸음을 재바르게 움직였다. 가장 아래에 있는 호수도 꽤나 컸다. 시간이 없고, 트레킹 준비를 하지 않아 미들 레이크, 어퍼 레이크까지 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프리 레이크의 특징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호수 빛깔이 특이하다. 물가에서는 호수 속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맑지만 전체적으로 에메랄드 빛이 진하다. 민트색 밀키스라고나 할까. 빙하가 암석을 깎으면서 암석 속에 포함된 소금 성분이 깨지면서 가루가 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물색을 여기서는 glacial milk라고 부른다. 빙하에 녹은 우유. 독특한 이 물색 때문에 좀 더 유명해진 호수 공원 lake park다.
그렇게 한참을 사진 찍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남쪽 휘슬러를 향해 다시 출발. 저녁 7시가 조금 안된 시계를 연료게이지 숫자 158과 함께 나란히 쳐다보면서. 그런데 차를 타면서 다들 한번 더 인식했다. 아, 우리 지금 폰도 네비도 안되지, 하고. 남쪽 휘슬러를 향해 달려 내려오다 보면 폰도 네비도 작동할 거라 믿고 달렸다. 우선 주유소를 발견하면 연료부터 넣어야지 하고. 오던 길을 그대로 달려 내려가다 주유소를 발견한 건 50분을 넘게 달려서였다. 그때 곤하게 잠들었던 조카가 깼다. 그러고는 이모부, 여기 비싼데요. 그러고 보니 189.9센트인 밴쿠버보다 훨씬 비쌌다. 202.9센트. 이모부, 다른 주유소 한번 가봐요. 그럴까. 이 몇 마디가 그날 사건의 시작이 될 거라는 건 조카도 나도 푹 잠들어 있던 남매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나는 다시 잠드는 조카를 룸미러로 한번 보고는 주유소를 들어갔다가 주유기를 지나쳐 출구에 맞닿은 도로로 미끄러지듯 나갔다.
셋다 잠든 사이. 외길인 도로를 50 여분 더 달렸다. 주변에 보이는 경관은 산. 가끔 농장이 보였다. 하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뒤에서 따라오는 차도 앞에서 마주 오는 차도 없었다. 시간은 저녁 8시가 넘어갔다. 하지만 auto로 설정된 자동차 라이트가 켜지지 않을 정도로 밝았다. 위도 49도의 여름 덕이었다. 내비게이션이 휴대폰과 연결이 끊어진 건 한참 전이었다. 화면에는 가느다란 선만이 도로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운전을 하면서 지나치는 모습이 왠지 몇 시간 전 조프리 레이크를 향해 달리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싶었다. 그래서 내비게이션 화면을 두 손가락으로 축소, 축소해 봤다. 아, 이런. 차가 밴쿠버에서 한참 북쪽, 알래스카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거꾸로 북쪽을 향해 그것도 50분이나 넘게 달린 거였다.
어쩐지 이렇게 한참을 달렸는데 폰도 내비게이션도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다시 인기척이 들렸다. 이번에는 옆에서 잠들었던 아드님이 먼저 일어났다. 어, 어디예요? 아,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은데. 그러면서 창밖을 두리번거리던 아드님이 그런다. 어, 저기 녹슨 버스. 정말 오래된 폐가 같은데요. 이런 게 아까 지나가면서 있었나. 그제야 따님도 조카도 뒷자리에서 잠을 깼다. 특히, 따님은 화들짝 놀라면서 일어섰다. 아드님도 따님도 휴대폰 먼저 들여다봤다. 어, 아직도 노 서비스다 하면서. 무작정 차를 돌렸다. 감으로. 그래서 달렸던 길을 다시 달려 내려왔다. 휴대폰에 미리 다운로드하여 놓은 구글 오프라인 지도를 보면서. 휴대폰 화면의 화살표가 이제야 남쪽 밴쿠버를 향하도록 방향을 트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50분. 문제는 연료와 허기. 휘슬러에서 11시가 조금 넘어 아침에 사 온 김밥 4줄. 그게 먹은 거 전부였다. 연료가 조금 더 저렴한 곳을 찾다 50분. 반대로 다시 50분을 더 달려야 했다. 이제 남은 연료로 달릴 수 있는 거리는 58km. 하지만 다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따님은 반복해서 그런다. 아까 조프리 레이크에서 노 서비스 뜰 때부터 불안하더라고. 어쩌지. 어떡하지. 룸미러로 보이는 따님의 눈빛은 진심으로 불안해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표정은 놀란 토끼처럼. 그러자 스물아홉 조카가 다독인다. 00야, 걱정 마. 아빠가 있잖아. 우리 우선 빵이라도 먹자. 그러면서 남은 빵 한 개를 4 등분했다. 나, 따님, 조카는 몇 입에 4분의 1조각을 다 먹었다.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아드님. 이 빵 한 조각이 일주일치 식량이 될 수도 있어. 난 남길 거야. 농담반 진담반이었지만 지금껏 키우면서 본 아드님의 모습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릴 때부터 맛있는 건 항상 남겨두었다가 동생에게 양보하거나 빼앗기거나 했다. 지금도 그러는 가 보다.
그러고 보니 열여덟 따님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구나 싶었다. 노 서비스.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 포함 모든 것들이 인터넷과 연결된 세상이 당연했던 세대. 세 살 위인 아드님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단말기의 성능 정도에서 차이가 났을까. 최첨단 세상의 일원으로 태어나 그 최첨단을 당연하게 누리면서 살아온 세대들이다. 어느 누구도 잠들지 못하고 그렇게 50여 분을 더 달렸다. 연료게이지는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어, 아까 그 주유소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알았다. 주유소가 달려오는 길과 나뉘는 길목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거다. 주유소를 들어가면 달려오는 길이 숲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는 곳에. 나가는 길이 달려오는 길과 같은 길이겠거니 하고 나가게 되는 그런 구조였다. 아니면 나가는 길에서 중앙선을 넘어서 억지로 좌회전을 했어야 하는 거였다.
그 무렵 차 안에서는 일제히 탄식이 감탄사로 바뀌었다.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짐짓 여유가 생긴 척하는 아드님이 옆자리에서 차 네비와 연결된 내 휴대폰으로 검색을 한다. 남쪽으로 7분 정도 거리에 있는 주유소와 맥도널드를 목적지로 설정했다. 그제야 자동차 내비게이션 화면에 짙은 푸른색 경로가 나타났다. 그 푸른색을 따라 붉은색 화살표가 미끄러지듯 흘러 올랐다. 그러는 사이 새하얗게 변하던 따님 얼굴이 선홍색으로 돌아오는 게 확연하게 보였다. 연신 자기의 휴대폰을 보면서 안도하고 있었다. 밤 9시. 다들 허기진 상태였다. 그렇게 맥도널드가 반가울 수가, 하는 표정으로 들어갔다. 따님은 자신 있게 키오스크 화면으로 네 사람 메뉴를 주문했다. 그리고 앉아 다시 조금 전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영웅담(?)을 나누는 사이 다시 이십여분이 흘렀다. 그런데 주문한 햄버거는 슬로 푸드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 왜 안 주지. 다시 한번 가볼까, 하면서 따님이 일어선다.
나중에 보니 키오스크에서 터치를 할 때 키오스크 계산 말고 직원한테 계산을 눌렀단다. 옵션을. 직원을 찾아서 직접 크레디트 카드를 건네고 결재를 해야 주문 완료였단다. 우리나라 키오스크에서는 보지 못했던 옵션이란다. 그렇게 따님이 직원한테 가서 직접 결재를 한 후 5분 만에 나왔다. 그렇게 맛있는 맥도널드 버거세트는 먹어 본 적이 없다,라고 다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맛있었다. 소고기 패티가 기름기 쫘악 빠진 그릴향이 가득했다. 담백했다. 그 늦은 시각에 햄버거 자체를 먹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어 더 그랬나, 연료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허기에 긴장감이 겹쳐서 더 그랬나. 차도 배도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 어둑한 밤하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산비탈 사이의 직선 도로를 달려가는 일만 남았다.
돌아오는 2시간 넘는 시간 동안 우리에게는 커다란 선물이 주어졌다. 맥도널드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각. 어슴프레 어두워 지는 시각. 휘슬러에서 운이 좋으면 볼 수 있다던 야생 곰. 그 곰을 도로에서 봤다. 고막이 펄럭거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다, 숨 죽이며 사진을 찍었다. 어둑해지는 길. 앞 차 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상황이라 멈춰서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는 없었지만, 당황해하는 아기곰을 숨죽이며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참을 달리다 긴장한 탓에 화장실 가는 걸 놓친 따님. 동서남북으로 오직 자동차 라이트 불빛 한줄기 밖에 없는 세상 속에 잠깐 멈추었다. 길가에. 그리고 내린 따님이 이내 창문을 두드리며 원래 그 밝고 호기심 많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나오라고. 내리라고. 그렇게 내린 머리 위에서는 도시의 불빛이 삼켜버린 수많은 별들이 살아 있었다. 너무나 많아 눈이 부실 정도였다. 까만 하늘에 한가득 반짝이는 별들이. 따님덕에 만난 그 별들에 나는 '오 별'이라는 이름을 붙어 주었다.
오 별을 만난 뒤 차 안에서는 짧은 토크가 이어졌다. 스마트폰이 당연한 세상. 최첨단이 계속 갱신되고 있는 세상. 그 세상이 어찌 보면 훨씬 더 불안정하고 통제적인 세상이지 않을까 하는 의견에 열여덟 따님까지 동의했다. 스마트하지만 너도 나도 길들여지는 세상. 누군가의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무한한 소비자로만 살아내는 세상. 인생을 통틀어 그 대가를 엄청나게 지불하면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 그렇게 자기 생산력이 아닌 타인이 제시하는 소비 능력에서 소외가 생기는 세상.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매뉴얼 Manual(수동)이 부재하는 스마트한 세상. 한 순간에 블랙아웃으로 변할 수도 있는 허약한 세상. 정전을 대비해 집에 꼭 있었던 초가 지금은 파티용 캔들이 되어 버렸으니. 남매들의 세상에는 정전이 없다. 항상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인 게 준비되어 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더 많이 살아내야 하는 남매들의 미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자정이 넘어 도착한 숙소 앞.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 따님은 또다시 멈춰 섰다. 아드님은 살금살금 따님에게 손짓을 하면서 반대편으로 가서 따님을 바라보고 섰다. 가로등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면서. 그 사이에 진회색의 토끼 한 마리가 멈춰 서 있었다. 집토끼, 아니 길토끼였다. 그런데 도망가지도 않고 마치 사진을 찍으라고 하는 것처럼 따님을 보고 아드님을 보고. 하지만 한발 다가가면 서너 걸음 달아나고, 한발 더 가까이 가면 다시 서너 걸음 달아나면서 그렇게 5분 넘게 남매와 늦은 대화를 나누었다. 멀찍이서 지켜보는 그 광경이 마치 한 폭의 유채화 같았다.
결국 그 기본이라는 것들을 인식하고 스스로 준비해 보는 연습이 더욱 필요해지는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정전을 대비한 초, 도어록 근처에 건전지, 움직일 때 언제나 먼저 챙기는 물병, 음식물을 쓰레기로 남기지 않는 행동, 적어도 가족의 번호는 기억하는 습관, 스마트폰 밖에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연필, 오프라인 기능 활용, 네모 안에서 빠져나와 나를 만드는 걷기, 달리기. 결국 최첨단 세상은 인간 스스로가 더욱 자기만의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세상이다. 아날로그를 죄다 가져다 버리면 안되는, 최첨단 세상이다. 남매들의 미래 세상에서는 분명 아날로그 지수(?)가 높은 이들이 진정한 어른이 되는 날이 올꺼라는 생각이 더욱 짙어진다.
열여덟에 국대가 되다 (0) | 2023.07.31 |
---|---|
먹자고 한 사람이 사는 거 있기 없기 (0) | 2023.07.30 |
Whistler & Joffre (0) | 2023.07.28 |
여권 파워 (0) | 2023.07.28 |
속도감을 찾아서 (0) | 2023.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