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새로운 일상을 꿈꾼다. [지금, 여기, 언제나의 오늘] 속에서 늘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아이러니한 상황을 선택한다. 언제나 놀거리를 찾고 마음껏 뛰어노는 공간을 꿈꾼다. 그러나 조금만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보라. 그렇게 늘 새로움을 꿈꾸듯 살지만, 동시에 익숙함에서 안정감을 갖는다. 안전을 느낀다. 늘 가던 길로 걷고, 어제 앉았던 자리가 더 편안하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늘 먹던 자리에 눈길이 먼저 가는 나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일팔 청춘 따님이 집에서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집에 있는데 집 가고 싶다'라고. 우리 모두가 그렇다. 그런 날이, 그럴 때가 가끔 찾아온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와의 정서적 유대가 풍부한 곳, 안전이 확인된 곳, 예측이 가능한 곳에 대한 정서적 안락함 때문이다. 물론 집이 그런 공간이 되는 것이 참 많이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는 순간순간 놓치고 살지만 말이다.
오늘도 잠시 멈추고 떠나가는 이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 듣고, 보면서 나도 다짐한다. [지금, 여기, 언제나의 오늘]을 나도 언젠가는 멈추리라고. 이런 현상 자체만 놓고 보면 고무적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옅은 여행의 의미가 조금 더 짙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짙어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보고, 먹고, 만나는 행위보다는 '살아보는' 행위에 더 초점을 맞추는 활동이라는 의미이다. 그 속에 여행의 본질이 있다. 벗어나서 잊음이 아니라 일상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감을 주거나 삶의 전환점을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 특히, 어린 자녀들이 생텍쥐베리나 롤링과 같은 사람들이 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어른들의 애씀. 그리고 어쩌다 된 어른이인 나에게 여가로서 나의 삶의 가치에 대한 보상. 그 보상을 통해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 그게 여행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살아보는' 행위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속에서 한달살이, 일년살이, 살아보기 열풍이 서서히 시작되어 왔다. 나는 실제 그렇게 움직여 보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참 바람직하고 좋은 열풍이라고 생각한다. 그 열풍은 한국에서 태어나 10대, 20대를 살아냈던 이들이라면 기억할 여행 아닌 관광. 자신의 일상을 멈추고, 다른 이의 일상옆에서 먹고, 놀고, 눈으로 구경하는 관광. 그렇게 일과 여행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데 익숙했던 관광객을 벗어나기 시작한 징조이기 때문이다. 소비적인 관광객에서 다소 생산적인 여행자로 나라 전체가 그렇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자녀들이, 다음 세대들이 10대 때, 여행의 본질을 알아간다는 건 그 10대의 긴 인생에서 치명적 이리만큼 훌륭하고, 멋진 경험이다. 그렇게 '살아보기'는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이 일상 여행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 살아본다는 건, [지금, 여기, 언제나의 오늘]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자기 일상에서 자신의 삶을 탐색하고 정체성을 강하게 만드는 시간과 공간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 '살아내는' 과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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