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야구장을 참 좋아한다. 그곳은 속에서부터 다져진 반듯함과 영혼까지 건강한 번듯함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 덕에 엄격한 규칙과 잘 짜인 질서 속의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 좋다. 우리 팀도 상대팀도 모두 오랜 시간 자신에게 투자한 이들이 모여들어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을 배울 수 있어 더 좋다.
나에게 야구장은 해방의 공간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본능의 열광을 일부러 흐트러지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토해낼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숨소리를, 뜨거운 심장을, 기분 좋은 흥분을, 실망하지 않는 고독을, 숭고한 열광을 180분 넘게 옆에서 계속 지켜볼 수 있는 공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
평일 늦은 저녁. 거의 다 빠져나간 차들이 남긴 온기에 엉덩이를 대고 도란도란 둘러앉아 별을 들어 건배를 하는 게 야구장 말고 어디가 더 가능할까. 우리 팀이 이긴 날은 이긴 기쁨에, 진 날은 다음에 대한 기대감에
맥주를 마시지 못하고 들고만 있어도 나는 술고래가 될 자신감까지 뿜어져 올라오는 듯한 현기증을 느낀다.
12월, 1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나의 야구장을 가득 메울 선수들은 새 직장을 구하느냐, 멈추느냐의 기로에 서는 시기다. 그렇게 전체 등록 선수의 약 10% 정도 되는 선수들만이 나의 야구장에 설 수 있다. 그러게 그게 끝이 아니다.
2월, 3월은 시즌을 준비하는 시기다. 다가 올 스프링을 위한 캠프에서 몸을 만들고 또 만들어야 한다. 그러는 와중에 마음을 챙겨서 일주일 내내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는 체력과 뜨거운 여름, 비난과 시기, 자괴감으로부터 자신을 이겨낼 영혼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진짜 자신과 만나면서 계속 갈지 멈출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할 거다. 자신만의 야구장을 가진,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25살. 단 7년의 전문 경력을 가진 젊은이가 새로운 직장과 계약을 하면서 240억이 넘는 연봉 조건에 사인을 했다. 한마디로 대박이다.
부모가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올인하지도 않았고, 거물 스폰서가 있어서도 아니고, 높은 하늘에서 달려 내려온 낙하산 부대도 아닌데 말이다. 올해부터 메이저리그에서 뛰게 될 야구선수 이정후 이야기다. 이 선수는 내가 어릴 때부터 응원했던 쌍둥이 팀이 유독 약해했던 이 선수는 처음 시작이 부모의 이름이 형용사가 되었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이 넘지 못한 벽을 자식이 대신 넘어서 주길 바란다. 하지만 이 선수의 경우는 반대다. 바람의 아들의 아들로 태어난 이 선수도 대략 난감했을 듯하다. 태어나 보니 내가 그 유명한 사람의 아들이었던 게. 부모가 워낙 유명하면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 명성의 울타리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부모가 못 넘은 벽을 넘으려 해도, 부모의 벽을 넘으려 해도 둘 다 자신의 실력으로 증명해 내야 하는 건 인생의 숙제 같다. 이래저래 부모보다는 자식이란 역할이 결코 더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선수의 경우 지금은 분명 부모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기를 증명하고 있어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어린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내 눈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게 화려한 유니폼이고 멋진 외모고 결과적으로 수입액이다. 뭐,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로 세계에서 탑 오브 탑은 연봉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해는 된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 속에는 엄청난 돈더미의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이 겪어본 게 사실이다. 결국은 돈이지만 결론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모 스포츠 신문에서 기사를 쓰는 선배가 있다. 기사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다. 선배가 전하는 '잘되는 선수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다. 실력도, 성실성도, 인성도 아니다. 그건 바로 나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의 유무였다. 그건 물리적인 나이와 관계없단다. 아무리 어려도, 걱정스럽게 많아도 그건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입장일 뿐이다.
이 선수는 그 면에서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만난 유명한 선수들 중 의지력이 강한 가장 젊은 선수 중 한 명이었단다. 이 선수가 최근 아름다운 미담을 하나 남겨 놓고 미국으로 떠난 모양이다. 세심하게 마음을 쓴 어느 기자에 의해 알려진 자그마한 이야기지만 왜 나이가 숫자에 불과한지를 한번 더 깨닫게 해 주었다.
이 선수는 샌디에이고로 떠나기 전 친구들과 횟집에서 회식을 한 모양이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야구를 시작했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단다. 물론 이 선수만큼 성공한 선수보다는 야구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어가는 친구들도 있었고, 야구는 하고 있지만 아직 전성기에 닿지 못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이 선수를 알아본 횟집 사장님. 너무도 유명인 이 선수의 사인을 크게 받아 가게 안에 오래오래 걸어두고 싶었을 거다. 그래서 빈틈에 이 이 선수에게 사인을 요청했나 보다. 종이와 펜을 내밀면서. 하지만 이 선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단다. 단호하게 거절했단다.
젊은이들끼리 (마음 상한 사장님 시점으로) 시시덕거리면서 계속 회식을 이어 갔단다. 그렇게 회식이 끝나고 이 선수는 계산을 하고 친구들과 한꺼번에 몰려 나갔다고. 유명인 사인을 걸고 싶었던 사장님은 꽤나 서운해했었을 것 같다. 그러면 그렇지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정후를 봤다,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널브러진 마음 같은 그릇들을 챙겼을지도.
그렇게 주방으로 가 설거지 그릇들을 쌓아 두고 테이블을 정리하는 데 이 선수 혼자 다시 가게로 들어왔단다. 어?, 왜! 하는 마음으로 휘둥그레져 있는데, 사정을 이야기하더란다. 그러면서 계산대옆에 그대로 놓여 있던 아까 그 종이와 펜을 바라보면서 손을 내밀었단다.
그랬던 거다. 이런저런 어려움에 있(을 수도 있)는 친구들 앞에서 난 체 하면서, 유명인 행세를 하면서 나 잘되었다고 사인을 하는 위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고. 아까 그 자리에서 그 말씀을 전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면서, 정성껏 여러 장의 사인을 남겨 두고 떠났단다.
산책할 때 자주 만나는 다리 밑 어둑한 길. 바닥에 '박수를 쳐보세요'하는 그림자가 둥둥 떠다닌다. 손뼉을 치면 노란 나비들이 바닥에서 다리 위로 내 머릿속으로 가슴으로 훨훨 날아다닌다. 사계절 내내.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이 선수가, 그 친구들도 같이 다 잘되기를 빌면서 손뼉을 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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