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끝자락이었다. 오랜 여자 친구와 교외로 여행을 떠났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그렇게. 손을 잡고 걷고 타고 기다리는 모든 시간들이, 순간들이 좋았다. 설레었다. 같이 있는데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한없이, 끝없이 걷고만 싶었다. 양평 용문산. 좁고 가늘게 닳은 등산로가 시작되기 전, 널찍한 임도를 따라 걸었다. 하지만 그날의 목적은 등산이 아니었다. 그냥 함께 하는 거였다. 나도 여자친구도 입고 있던 옷이 말하고 있었다. 산과는 그리 딱 어울리지 않았던, 그런 복장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짧게 걸었다. 그래도 산 속이라 서너 시간이 흘렀다. 늦지 않게 돌아가야 했다. 용문산 아래 주르륵 있는 식당, 술집. 이런 곳 중 한 곳에서 두부에 막걸리를 사 먹었다. 이른 저녁 대신. 그리고는 다시 터널 터널 용문산 주차장에서 시내 터미널까지 걸었다. 차가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렇게 그냥 걷자고 했다. 얼마나 걷고, 몇 분에 도착해야 하는 것도 계산하지 않고, 그렇게 그냥 걷자고 했다. 아마 내가 먼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여자 친구가 동의했을 거다.
가을이었다. 막 추워지기 전. 바람이 사납게 불거나 좀 더 차가워지기 던. 그러나 도로를 덮고 있는 하늘에서는 끝없이 낙엽이 떨어졌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세트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듯이. 무대 위에 누군가가 걸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낙엽을 서너 개씩 흩뿌리듯이 그렇게 휘날렸다. 20대. 가을. 두부 막걸리. 게다가 등산이라니. 참, 일방적이게 올드했었던 데이트 코스였네 싶다(물론 이십 몇년 전 그때는 그렇게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여자 친구는 웃었다. 내 손을 꼭 잡고. 소리 없이 미소로만. 리자 부인의 미소, 그 미소였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을 떠나야만 했던, 잃었던 그 미소가 여자 친구의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내가 걷는 건지, 걷는 게 나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떨어지는 낙엽 사이를 아주 천천히 걸었다. 떨어지는 낙엽을 손으로 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맞으면서 걸었다. 다만, 우리 둘은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밟지 않으려고 애썼다. 서로 그렇게 약속도 하지 않았으면서.
하천 옆 휘어진 도로 위로는 몇 분 만에 한 번씩 빠른 속도로 차가 우리를 지나쳐갈 뿐이었다. 그렇게 몇 대의 차가 지나갔다. 저 멀리서 빼꼼히 차가 보일 때마다 나는 여자친구를 도로 안쪽으로 들어가게 손을 끌었다. 그때도 그랬다. 그런데 짙은 색의 그 승용차는 아주 천천히, 천천히 우리 옆을 지나갔다. 느낌에 초보는 아닌데, 일부러 늦게 가는구나 싶게.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그 승용차도 우리를 지나쳐 갔다.
그런데 몇 미터 우리 앞으로 지나치던 그 승용차 브레이크 등이 붉게 물들었다. 도로 위에 달라붙어 있는 단풍과 길게 길게 리본 돌리기 놀이를 하는 것처럼 붉게 이어졌다. 그리고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본능적으로 나는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멈췄다. 아마 멈춰 움직이지 않는 우리를 봤는가 보다. 앞자리 오른쪽 창문이 열리더니 보라색 팔이 쑤욱 나왔다. 그리고는 아주 느릿하게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앞으로 오라고. 오라고.
운전석에 앉은 남편도, 손짓을 한 아내도 모두 백발이었다. 칠십 대는 족히 넘었지 싶은 느낌이 들었다. 도로를 걷는 우리 둘의 뒷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이뻐서 방향이 같으면 같이 갈까, 하셨단다. 당신들이 우리만 할 때가 생각났다면서. 그렇게 우리는 노부부의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남양주 시내까지 한 시간을 넘게 함께 했다. 늦가을 저녁은 한없이 짙었다. 노란색, 붉은색 사이에 할로겐 등이 수없이 지나쳐갔다. 하지만 그 불빛은 그저 우리 둘의 눈을 어지럽힐 수 없었다.
자동차에서는 속도감을 느낄 수 없었다. 액셀을 밟았다 떼었다 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부드럽게, 천천히 자동차는 정해진 레일 위를 달리듯 움직였다. 마치 두 배우가 트럭 위에 올라탄 타에 앉아 운전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연기를 하는 듯했다. 운전 중에도 두 손을 꼭 잡았다 떼었다 하면서. 그런데 손을 잡고, 떼는 게 다급하지도 경박하지도 않았다. 쓰다듬지도 그리고 노부부는 우리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일체 묻지 않았다. 그냥 이뻤다고, 요즘 젊은이들이 누가 그렇게 걷냐고, 그냥 보기 좋았다는 삼십여 분전 출발할 때의 그 말이 전부였다.
노부부는 얼굴을 마주 보지는 않았다. 두 분 다 앞을 바라보면서 등에 주름 가득한 두 손만 자주 만났다 헤어졌다 했다. 아내분이 의자에 딱 붙어 있는 것 같은 남편분을 가끔 돌아봤을 뿐. 아주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천천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긴장한 탓도 있지만, 노부부의 뒷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 둘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숨 쉬는 소리조차 날까 봐 자연스레 가슴이 아니라 배로 숨이 쉬어졌다. 쳐다보지 않아도 여자친구도 마찬가지였단다.
가는 길이 달라져 더 같이 못가 미안해하시던 노부부. 그렇게 서울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타는 내내 한참, 우리는 말이 없었다. 꼭 손만 잡고 있었다. 딱 한마디만 했다. '우리도 저렇게 나이 들어 가자'고. 그 말에 여자친구는 다시, 그 미소로 대답을 했다. 그 미소 덕분에 우리 둘은 이십 년 넘게 그렇게 나이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그때의 여자 친구는 그때 사 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맛난 두부 김치에 어묵탕을 일품으로 만든다. 가끔 그렇게 밥대신 막걸리에 두부 김치를 먹고 싶어 한다. 뜨끈한 어묵탕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그럴 때마다 그 노부부 이야기를 한다. 아니, 그 장면을 기억해 낸다. '우리도 저렇게 나이 들어 가자'는 약속을 잃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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