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두 번 본 영화가 생겼다. 그것도 연속으로. 앞으로도 웬만해선(!) 없지 않을까. 지난 토요일에는 아내가 옆에서 눈물을 삼키는 동안, 깊은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라 울 수가 없었다. 어제는 아내가 또 울먹이는 옆에서 흐느껴 우는 따님옆에서, 따님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조금 더 이성을 찾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과정에 관심을 갖고, 투자금을 끌어 모아, 작품화하는 분들이 진짜 진짜 고맙다. 지구온난화 문제보다 내 혓속의 자그마한 상처에 훨씬 더 신경을 쓰고 사는 내가 이렇게라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를 콕 집어 주니 말이다.
세상모르고 즐겁기만 했을, 여덟 살 6개월의 내가 오십한 살 6개월을 지나면서, 그 마음으로 내게 보인 영화 <서울의 봄>이다. 이미, 역사가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우리의 거의 모두가 알고 있는 결말이다. 하지만, 정말 결과만 알고 있지 과정 속에 숨겨진 비밀을 알 턱이 없었다. 기록으로, 설명으로 남겨지지 않았으니.
스토리 구성의 스포에 주의하면서, 며칠 간격으로 연속으로 보면서, 내 눈에 보인 영화 <서울의 봄>의 메시지를 정리해 본다.
1. 폭력적인 억압의 근원
<서울의 봄>은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박힌 주류에 의한 비주류의 폭력적인 억압의 근원을 말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한참 흔들었던 갑질 논란의 근원을. 학력으로, 재력으로 무장해서 크고 작은 헤게모니를 가진 이들이, 그렇게 주류에 속한 이들이, 당연히 다수가 되는 사회. 그리고 다수가 항상 옳다고 여겨지는 사회. 그 사회의 출발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과정보다는 결과에 치중한다. 특정 사람에게 충성한다. 학연과 지연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언제나 솔직하지 못하게 비밀스럽다. 대가성 있는 인간관계에 집중한다. 그 정도는 다 참아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강요한다. 인권보다는 권력을 중요시 여긴다. 부귀영화를 대물림하는데 혈안이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그들'을 흉내 내는, 더 가진 자들의 우월 의식은 여전하다. '그들'은 내 차 안이 지저분해져서 우리나라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그런 아주 자그마한 행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언제나 폭력적인 정체성을 숨기고 산다. 표출하는 방식과 타이밍이 다를 뿐이다. 크게는 안으로 표현하는 이는 자신을, 밖으로 표현하는 이는 타인을 지치고, 힘들게 할 뿐이다. 12.12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전두광이 어둑한 화장실에서 혼자 진하게, 깊게 끌어 오르는 폭력적 승리감에 웃어젖히는 장면. 그 장면이 비인간적인, 마초적 폭력성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2. 유니포미즘uniformism의 사회적 책임
<서울의 봄>은 기존의 12.12사태를 다룬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포인트를 전하고 있다. 영화 내내 나의 눈에는 수도 경비 사령관 이태신의 군복이 눈에 계속 따라다녔다. 가슴 쪽은 물론이고 등, 허벅지 뒤쪽에 선명하게 보인 군복의 '칼주름'. 스물 하나, 둘. 군인 신분이었을 때 내무반에서 군복 다리미는 상병을 달면서는 다 내 담당이었다. 임무가 아니라, 내가 자처한 역할이었다.
그렇게 선임과 후임들 휴가에 맞춰 군복을 다려줘 입혀 보내는 마음이 그렇게 좋았다. 그래서 조금은 안다. 칼주름을 잡는 게, 그 주름을 유지하게 잡는 게 쉽지 않다는 것 정도를. 연출팀은 이 부분에 꽤나 신경을 쓴 것처럼 보인다. 이 '칼주름'은 나에게 유니포미즘uniformism으로 보였다. 긍정적인 의미로. 경찰, 군인, 소방관, 의료인, 법관과 같은 특정 유니폼을 입은 이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을 사회적 책임을 지닌 권위로 만들어 주는 게 '그들'의 제복이다. 작품 내내 이 메시지는 계속 흐른다. '그들'의 군복에서는 주름이 보이지 않는다. 군복이 마치 양복처럼, 팀의 통일된 복장처럼 비춰진다. 어디에서도, 사명감은 읽히지 않는다. 수방사령관(정우성분), 특전사령관(정만식분),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정해인분), 헌병감(김성균분). 그들의 유니폼은 유니폼에 맞는 사명감으로 입혀져 있었다. 단정했고, 절제가 넘쳤고, 다부졌고, 단호했다.
3. 시민의 역할
대치중이던 반란군과 진압군. 그 사이를 무기력한 위정자가 끼어든다. 그리고 현장에서 수방사령관을 직위 해제한다. 그러는 과정을 주변 상가, 인도로 시민들이 모여들어 바라본다. 이때, 반란군은 시민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제지한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반란군 수괴 전두광은 말한다. '야, 그냥 보게 나둬'.
'그들'에게 시민은 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언제나 말 많고, 귀찮은 존재다. 잘 구슬려 먹을걸 던져줘야만 입을 다문다고 생각하는 하등한 개, 돼지이다. 그래서 잘 이용, 활용해야만 하는 대상들이다. '그들'에게 시민은 두렵지 않다. 반면 수방사령관이 야포단 공격을 시민들 때문에 더욱 머뭇거리는 사이, 역시 시민이었던, 다시 시민이 될 수많은 반란군, 진압군 사병들이 함께 지켜 보고 있다.
이 상반된 시선이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오랫동안 억압하고 있었다. 오랜 역사의 교훈(?)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시민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아주, 먼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탄생하는 길목에서 일제에게 몸으로 배운 것이다.
그렇게 밥은 굶으면 안된다는 인간의 본성을 휘어 잡아,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하고, 인내와 헌신, 열정 페이를 강요하고, 내 편과 남의 편을 조장하고, 이끌던가, 따르던가, 꺼지던가를 매 순간 선택하게 만드는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그들'의 시스템에 꾸준히 업데이트 해 온 것이다. 그나마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 내어 그나마 지금, 이 정도의 대한민국이게 다행일 정도로.
하지만, 우리는 또 다시 잊어가고 있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고비의 역사를. 어제 같은 시각에 영화를 보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한 무리의 여학생 - 꽤 사람들이 많이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큰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웃는 모습을 보면서 고등 학생들인줄 알았다 - 들의 대화. 와, 대박. 열받아 죽는 줄 알았네. 나, 한국사 6등급인데, 공부 좀 더 해야겠네. 내년에 수능볼때 시험에 나올 듯. 나는, 맨날 구석기, 신석기에서 끝났는데, 이제는 12사(아마 12.12사태를 줄인 듯)는 알겠네. 4.16도(아마 4.19?), 5.16도(아마 5.18) 공부를 좀 해야 겠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느릿하게 흘렀던 군가 '전선을 간다'. 이십대를 막 시작하면서, 눈물 흘리면서 불렀던 그 군가가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들린다. 치열했던 그때의 전장(시대)을 지금의 병사(시민)들이 다시 지나가면서, 죽은(실패한) 이들을 지나치면서, 다시 진격(도전)해서, (좀 더 의미있게)살아내야 한다고. 그게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라고.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젊은 넋 숨져간 그 때 그 자리 상처 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네
푸른 숲 맑은 물 숨쉬는 산하 봄이 온 전선을 우리는 간다 젊은 피 스며든 그 때 그 자리 이끼 낀 바위는 말을 잊었네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아내와 4년만의 영화관 나들이, 우리셋이 같이 한 난생처음 영화관 나들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수다스러웠던 어린 시민들을 에게도 영화 <서울의 봄>은 아주 선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봄은 꼭 강렬한 겨울을 지나야 더욱 향기가 진해지겠지만, 많은 이들이 올바른 유니포미즘으로 사회적 책임감을 다할 수 있도록, 이런 멋진 작품을 만들어 준 팀들에게 그저 한없이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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