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는 어느 날 약간의 치매기가 있는 외할머니의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에리를 자신의 딸인지 알고 남편과 이야기해 봤느냐 에리의 남동생 슈헤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3년만 참아라 그 다음은 너희 부부가 마음대로 해도 반대 안 한다고 말한다. 그걸 듣고 에리는 부모가 이혼을 준비 중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고는 친구들, 선생님으로부터 이혼 준비 징조 대처법등에 대해 조언을 구하느라 마음 고생을 한다. 그러나 정작 남동생과 부모님에게는 물어볼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러다 동생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동생이 이미 자신보다 먼저 부모의 이혼에 대한 낌새를 채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식 때문에 이혼을 참는 건, 자기가 졸업할 때까지의 3년이 인생낭비라며 자기는 어떻게 되든 이겨낼 수 있다는 고1 남동생의 이야기에 용기를 낸다. 엄마에게 이혼할 거냐고 물어볼 용기를. 그리고 학교에서 지금껏 조언을 구하고 수다를 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문자를 보낸다. 용기를 갖고 엄마한테 물어서 확인해 보겠다고. 그러자 도서관에 있던 친구들이 금방 달려온단다. 안아주러. 고3인 에리의 친구들은 용기를 낼 필요가 있으면 서로 허그해 준다.(중략) 10대는 어른들, 특히 부모들의 생각보다 훨씬 신중하다. 그리고 친구가 전부이다.
가끔은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에리를 만날때가 있다. 내가 그 나이였으면, 그 상황이었으면 그 정도는 고사하고 삶 자체를 유지하지 못했을 텐데 하게 만드는 기특한 에리를. 그런데 그 에리들을 들여다보다 문득 섬뜩해진다. 그 속에 녹아 있는 내가 보여서. 그러면 내 안에서만 되내인다. 그때, 한 번만 정확하게 물어볼 걸, 확인해 볼 걸.
얼마 전 주말. 뜨거웠던 7월말에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온 40년 지기 고향 친구. 가전제품이 붙박이로 구석 구석 숨겨져 있는 새 집에 들어간 덕에 우리 부부가 결혼하면서 같이 온 덜덜 거리던 넙직한 에어컨이 슬림한 투룸 에에컨으로, 반려견 타닥이 보다 더 나이 먹어 경운기 소리가 나던 전자레인지가 오븐 겸용 전자레인지로 강제 교체되었다.
여기에 하나 더. 인덕션. 집에 있는 것도 새거라 그 인덕션은 얼마 전 폐암 수술을 하시고 통원치료 중이신 어머님댁에 가져다 드렸다. 평생 담배 한 개피 손에 되지 않으셨는데. 십년 넘게 자그마한 환기구 밑에서 밥집을 운영하시고, 삼시세끼 집밥을 만드느라 매케한 도시 가스 앞에 반편생 넘게 시간을 보낸 탓이리라.
처음 써보시는 인덕션 사용법을 알려드리는 데, 자꾸 인덕션이 소리친다. 적합한 용기인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껐다 켜면서 이렇게, 여기를, 하나 둘 셋 하는데 또 소리친다. 적합한 용기인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식이 이렇다. 이렇게 어설프다. 인덕션만 들고 가고 인덕션용 용기는 못 챙겨간 거다.
불쑥 히데오의 소설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하나가 떠 올랐다. 인덕션에 필요한 용기야 돈을 주고 사면 되지만, 깜박한 용기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챙겨야 할 용기가 어디 그 용기뿐인가 하고. 지지난 주 새롭게 발견(?)한 우리 동네 익숙한 골목 안 전기 통닭구이집.
어제 저녁에 텍사스 바베큐 세트 하나를 테이크 아웃해서 따님과 함께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너 걸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나를 옆에서 따님이 사진을 찍는다. 뭐, 항상 그러니 그려려니 했다. 건너오는데 뜬금없이 고백한다. 아빠 나는 폰 안에 있는 내 사진은 마구 지워. 그런데 엄마, 아빠 사진은 하나도 안 지워.
그러면서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으면서 나를 쳐다 본다. 왜? 그랬더니 그런다. 혹시 못 보게 될 때 사진이라도 많이 남아 있어야 하니까. 슬프게 다운 된 상황이 아니었다. 그 장면은 어릴 적부터 내내 한 밥상머리 교육(!)덕분이었다.
아내한테 혼이 나면서도 가끔 그랬다. 우리가 가끔 그러는 것처럼. 지금이 우리가 함께 나눌 마지막 시간이다, 생각하고 서로에게 관심을 더 갖고 살자고. 그래서 집을 나가고 들어오고 할 때 꼭 문 앞에 나와서 눈 맞추면서 인사하자고.
힌 십년이 넘었을 것 같다. 우리반 아이들과 의미있는 활동을 해 보던 그 맥락에서 유서쓰기 활동을 했었다. 지금은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죽음은 삶에서 금기어처럼 취급하던 때 였다. 왠만해선 결핍이 없는 요즘 우리들. 심지어는 부모의 결핍을 숨기면서까지 자식들에게 결핍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양육 방식.
많은 경우, 문제들은 '결핍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부족한 게 없어서, 아쉬운 게 없엇, 언제나 당연하다고 여겨서. 그래서 지금보다는 한참 더 어렸던 나는 용기를 냈다. 서른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생각하고 남게 되는 사람들한테 유서를 써 보라고.
앞뒤로 취지와 의미를 충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은 쓰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도 남겼다. 하지만 다 썼다. 내 기억에 한 명도 빠짐없이.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관계자 회의에서 수업의 취지와 어린 학생들에게 미칠 악영향에 대해 고해 성사를 해야 했다. 지금, 그 아이들(?)이 삼십대 초반 일꺼 같다.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설득의 3요소다. 이중에서도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확실한 요소는 무엇일까. 그건 분명 에토스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움직이는 거.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 사람의 인품, 인격을 믿기 때문에. 전작(?)이 있기 때문에.
하루끼가 며칠 전 6년 만에 신작을 발표했다.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그냥 믿음이 가고, 읽고 싶어지는 이유처럼. 그런데 사실, 나는 하루끼보다 더 끌리는 소설가가 있다. 바로 오쿠다 히데오.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딱 이런 느낌이다. 나에게는. 그래서 기분이 가라앉으면 히데오의 소설책을 펼친다. 읽고 또 읽는다.
내 삶이 투명하게 얇은 셀로판지처럼 반짝여 보인다. 몇 페이지 안되는 그 내용속에서 나, 나의 어제와 오늘, 나의 삶과 비슷하게 밋밋한 삶 속에서 옥빛 영롱하게 행복해지는 요소를 찾아내 준다. 그리고 그 속에 감사와 사랑이 들어찬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행복하라고, 긍정적으로 살아내라고, 넌 괜찮다고.
대신 그 몇마디가 나는 그렇게 읽힌다. 지금, 용기를 내라고. 표현하라고, 물어보라고. 그리고 안아주라고. 또 포옹하라고. 그렇게 포용하라고. 그리고 먼저 안겨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