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나깨나 동명이인 김작가는

절대안된다, 상대적으로 살아라!

지담티 2024. 1. 10.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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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건 분명 혼자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특정한 문화권에서 스스로 나에게로만 빠져드는 안타까운 경우가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회 모든 시민의 사회화에서 '과정'은 물론 '결과'적 책임이 국가에서 가정과 학교에 소속된 '개인'에게로 슬쩍 넘겨진 지 오래다. 우리는 그 세월을 살아냈다. 십몇 년 남짓한 '공부'하나로. '이겨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 시스템 속에 들어갈 수 있는 브레이크 없는 레이싱카 시스템. 그렇게 현행 교육 제도는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다. 
 
그 결과 '하는(한) 만큼 먹고사는'게 당연히 정의로운 거라는 집단 무의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라고 잘 안내받아 왔다. 끝없이 자신의 '원죄'에 시달리는 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끔. 그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차별은 정당하다고 인정하면서 살게끔 만들어 놓는, 아주 훌륭한 시스템이다. 내 새끼는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도포되어 있다. 그렇게 모든 책임은 하필 '그때' 태어난, 개인적으로 공부를 '안' 한, '못' 한 개인에게로. 마치, 어느 시대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가가 인생의 복불복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경쟁> 구조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IT강국이란다. 그런데 그게 뭐. 인터넷 쫌 빠르면 내 삶이 위대해지는 건가. 아직 '암기력이 곧 학력'이라고 대놓고 외치던 수십 년의 모습 그대로 세상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데. 아이러니다. 여전히 암기해야 할 그 내용들을 누가, 왜 정했는지를 묻지도 따져보지도 못한 채.  볼 수 있는 것과 들을 수 있는 것만 기록해 놓은 것을. 그렇게 학교에서 시작된 '전체에서 몇 등'이 평생 우리 삶을 지배한다. 나 스스로 지배당하는 걸 당연히 여긴다. 
 
매일 몸과 마음을 갈아 넣고 살면서도, 하늘 한 번 올라다 보고, 바람 한번 제대로 맞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그만둘 때까지' 다그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면서도, 이게 사람 사는 게 맞나 싶게 살면서도, 저렇게 키우는 게 맞나 싶으면서도, 외면한다. 운동과 시각의 황홀경으로 도피한다. 혓바늘이 온 세상을 지배할 때, 당연한 정의감에 한해를 잘 살아낸 스스로를 위로할 때, 지금의 삶이라도 감사하다고 온 세상이 자축할 때,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2028 대입제도 개편 시안에 발표되었다. 아이들을 나누는 등급만 줄인 채 다시, 세밀한 경쟁 속으로 몰아넣을 건가 보다. 절대, 너의 삶을 살지 말고 상대적으로 살아라라고 다시금 강요하려 한다. 
 
교육은 (사라진 기성세대한테 물려받은 유산으로 성장한) 기성세대가 후세대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 있나. 먼저 보고 경험한 사람이, 못 보고 경험 못한 사람한테 말로, 글로, 몸짓으로, 체험으로.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도. 수천 년간 인간이 써 내려온 '공부'의 역사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다. 절대적인 자기 수양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도전하고, 내가 정해 놓은 다음 기준을 넘어서면서 성장하는 거였다. 스스로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만드는 게 진정한 배움인 거다. 
 
그 물음을 동시대에 함께 살아내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고민하고, 같이 실천해 보는 과정에서 스스로 찾아내면서. 공부에 독학이란 없었다. 생애 첫 학교, 유치원에서 그러지 않았나. 아니 그전에 동네 놀이터에서 그러지 않았나. 길거리에서 그러지 않나. 길을 모르면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그 동네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가장 안전하고, 편하지 않나. 평생 자기 분야의 일을 잘 마치고 다시 주민 센 테에서 모여, 동네에서 모여, 노인 대학에서 모여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려고 하지 않나. 창문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 다 알지 않나. 
 
공부는 일인가 놀이인가. 일과 놀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수단과 목적의 일치성이다. 일치하면 즐거운 놀이고, 불일치하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 자고 볼일 보는 건 일인가 놀이인가. 우리는 아무런 죄 없는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경쟁구도 속에서 '스스로가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일과 놀이를 철저하게 분리시켜 익히게 만들었다. 그래서 스스로가 일하는 건 당연하고, 노는 건 죄의식까지 느껴야 한다. 공부 안 하고, 놀면 불안한 부모가 되었다. 학부모가 되었다. 
 
그런데 공부가 진정한 놀이(였)다. (놀이터에서 그네 타고, 자전거 타고, 게임기로 게임하듯이) 제대로 잘 노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공부법과 자기 내면의 다음 교육과정이 만들어지는 거(였)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 짠했나, 재수 없었나. 저 말이 세월이 흘러 지금은 어떤가. 그대로 느낌인가. 살다 보니 그렇다. 저 말이 정답이라고. 살다 보니 하는 만큼 나오는 게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왜 그럴까. 외롭기 때문이다. 연대감이 없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것은 물론이고 나라는 존재 하나에만 생기는 모든 갈등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기성세대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교과서에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말고, 외우기만 하는 게 가장 편했던 거였다. 그렇게 다 키워서 사회에 내보낼 때 마음이 학생 때보다 부모 마음이 그리 넉넉하게 편하기만 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다. 인간은 연대감 없이 외로우면 세상을 살아 낼 자신감의 샘물이 말라버린다.     
 
학교는 사회화 기관인가 아닌가. 사회화는 (놀이터에서 처럼) 서로 순서를 지키고,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함께 안전을 지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거다. 1 다음에 2, 2 다음에 3을 혼자 스스로 (암기력이 훌륭해서) (지능이 높아서) (태어나 봤더니 집에 돈이 많아서) 잘 익히는 게 아니다. 아니, 그게 더 문제가 된다. 뒤섞여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시행착오에서 남은 진짜 정의로운 삶의 지혜를 공유하는 과정이 있어야 반도체보다 더 민감한 한 인간의 사회화가 시작되는 거다. 
 
그런데, 칸막이 안에서 여전히 쥐 죽은 듯 생각 없이(생각을 없애고) (올라오는 생각도 누르면서), 여전히 (잘, 많이) 외운 양으로 줄을 세우면 어찌 될까. 그 모습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 표출된 지 오래다. 학교에서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다. 아니 '십년지대계'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럭저럭 (억울하고, 아쉽고, 안타깝고, 아까운) 시간을 잘 이겨내 지금을 살아내는 학교밖 우리들은 또 먹고 사느라, 어디서부터 손을 델 수 없어서, 다들 잘 알아서 하겠지 하고 있다. '공동책임은 무책임' 상황이다. 
 
그런데, 실마리는 간단하다. 아이들과 아이들 사이의 칸막이만 없애 달라. 학교에서 수업으로 제대로 협력하고, 자기 기준을 스스로 정해서 성취감을 느끼도록 해달라. 사람은 작은 성공의 경험에서 성장한다. 오래된 미래다. 일 년 서너 번 있는 거대한 태풍 속에서 살아남는 법만이 필요한 게 아니다. 더 수많은 날 잔잔한 개울가에서 같이, 사람답게 사는 법을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게 해 달라. 그러면서 먼저 손을 내밀고, 같이 울어볼 수 있도록 해달라. 어깨동무하고 마음껏 웃어볼 수 있도록 해달라. 그렇게 성장한 그들이 세계 최고 속도의 IT를 발판으로 일찍부터, 지속적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동네에서도, 회사에서도, 같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슴속에 품을 수 있도록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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