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담티 2023. 11. 28.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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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가 조금 넘어 출발했다. 새벽녘에 배관을 타고 흐르던 빗소리가 온 세상을 더 깊게, 잔잔하게 잠재우고 있었다. 가을 들어 처음으로 열여덟 따님과 함께 나섰다. 아니, 따님이 나서는 데 내가 따라갔다. 지난 토요일은 세상이 정한 기준 밖에서 혼자 공부한 따님이 난생처음 IELTS 시험에 도전해 본 날이었다. 

 

올해. 막 뜨거워지기 전. 내내 마스크를 하고 한참을 동선이 같아, 출근길에 같이 달렸었다. 혼자보다는 둘인 게 훨씬 더 낫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운전하는 내 옆에서 내내 디제이를 하면서 나와는(?) 다른 장르의 노래, 노랫말, 비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물하나 아드님도 그랬다. 오히려 10대가 음악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오히려 연령이 높아지면서 비슷한 분위기의 음악을 좋아라 하는 경향이 있다. 빠르지 않은 비트에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노래에. 그런데 10대는 따라 하지 못해도 좋다. 그리고 오히려 비트보다는 가사가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해 내뱉어 주면 더욱.

 

그날은 타자 마자 아빠, 블루투스 한다. 그리고는 (이미 담아 놓은 듯) 노래들을 연속에서 들려준다. 부담된다면서 먹는 야채죽을 조금 나눠 먹은 헛헛한 뱃속으로 심장이 떨어졌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다. 앞뒤로 달리는 차들이 내 고막의 바운스에 맞춰 앞뒤로 왔다 갔다 속도를 조절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명 열여덟 따님표 전투력 상승 플레이리스트. 첫 번째 곡은 Maverick. 두세 번 반복하는 가사 속에서 나는 찾아냈다. '기쁨 주는 날'이라는 가사를. 난 그렇게 들렸다. 기쁨 주는 날~ 나잇, 나잇, 나~잇.  아는 비트에 모르는 가사를 흥얼거리면서 핸들 위 손가락이 깃털같이 하늘거린다. 따님의 오른손은 전투기가 되어 날아다닌다. 

 

 

새로운 시작은 늘 설레게 하지. 모든 걸 이겨낼 것처럼. 시간을 뒤쫓는 시곗바늘처럼 앞질러 가고 싶어 하지. 앞질러 가고 싶어 하지 그어 놓은 선을 넘어 저마다 삶을 향해 그 선을 먼저 넘지 말라고 I can fly the sky Never gonna stay  내가 지쳐 쓰러질 때까진 ~~~~~~~ 원하는 대로 다 가질 거야 그게 바로 내 꿈일 테니까~

 

 

듣고만 있어도 내가 먼저 힘이 하는 '시작'이 두 번째 곡이었다. 심장을 쿵쿵거리는 흉내를 내면서 눈에 힘을 주는 따님을 보니 도전하는 마음이 불안감보다 살짝 더 커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 번째 곡. '오, 와, 정말 노랜 만에 듣는다, 아빠가 참 좋아하는 곡인데'. 지오디의 '촛불 하나'

 

난생처음, 22년째 처음 해보는 아빠란다. 그래도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유일한 건, 지금처럼 불안하고 힘들고 지치려고 할 때 아빠한테 기대. 혼자라는 생각 말고 기대. 우리 따님이 잘하는 것처럼 혼자 터벅터벅 앞서 걸으려는 나를 먼저 손잡아 끌어 같이, 그렇게 같이 아빠도 걸어줄게......

 

라고 말을 하는 눈빛으로 옆에 앉아 눈을 감고 노래를 따라 하는 따님 왼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 곡은 8월 내내 오빠 외국인 친구들과 즐겁게 놀면서, 난생처음 교회라는 커뮤니티를 세 번 토요일마다 나가면서 마음에 남게 되었다는 ccm, 'One Way'를 흥얼거리면서 창밖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 파이팅 하고 붉은 건물 속으로 사라졌다. 

 

토요일 이른 아침. 경사진 골목골목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시각. 얼마 전 수시 면접 첨삭을 해주다 아아들한테서 배운(?) '쫌쫌따리'라는 말이 폭하고 떠올랐다. 요즘 10대들이 쓴다는 은어다. 그런데 줄임말 못 따라가지만, 싫지만. '쫌쫌따리'는 좋다. 따라 하고 싶다. 의미도 마음에 든다. 

 

시험 다 본 그날 저녁에도 따님이 극렬하게 제일 좋아하는 매운 닭발을 먹었다. 그런데 따님 역시 무뼈 닭발보다는 뼈 닭발을 좋아한다. 먹을 것도 많고, 먹기도 편한데, 굳이 뼈 닭발인 이유가 바로 '쫌쫌따리'이기 때문이란다. 붙어 있는 살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적은 살이라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더 좋다면서. 

 

아이엘츠 시험은 유학을 가기 위해 필요한 영어능력시험이다. 대부분의 영어권 대학에서 요구하는 시험. 여권으로 본인 여부를 확인하면서 6번의 지문을 찍고, 사진을 찍고, 대기하다 오전에 라이팅 60분, 리닝 60분, 리스닝 40분을 페이퍼로 보고 12시 30분에 나왔다. 내가 기다리던 건물 아래 카페로. 

 

그리고 점심 먹고 점심 먹고 3시간 정도 대기했다가 3시 50분에 다시 입실. 4시 20분부터 20분간 1:1 스피킹 테스트. 마흔 명이 넘는 응시자 중 미성년자는 따님 포함 3명이었단다. 미성년자만 보호자 싸인이 들어간 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 

 

고단한 시험이다. 아니. 시험은 다 고단하다. 따님덕에 벤티 사이즈를 두 번이나 먹으면서 난생처음, 하루 종일 카페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놓고 이런저런 일을 해보니. 좋지만, 쉽지만은 않다. 그냥 앉아 있기만 한 것도.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추는 연습을 하는 게 시험이라는 거지만 그 속에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볼 가능성이 적은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결과가 좋은지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 알았으면 하고. 

 

그 타인들이 내가 약하다고,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게 싫어서 억지로 하는 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물론 결과도 그렇게 만족할 만한 게 나올 확률은 떨어지는 거라고.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여겨지는 게 싫어야 혼신의 힘이 다 나온다고. 내가 보여야, 나에게 집중해야, 진짜 나를 만나는 거라고. 

 

시험이 다 끝나고 아내와 내가 따님과 함께 있는 톡방에 따님이 짧은 메시지를 하나 올렸다. 

 

 

Retry

 

 

'그래, 황사, 미세먼지, 한여름을 지나면서,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한번 걸리지 않으면서 쫌쫌따리 하느라 애썼어. 이제 다시 시작이 아니라, 진짜 시작, 새로운 도전을 다진 거 축하한다. 언제나 우리 다 같이 쫌쫌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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