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물:세상의 모든 물건들

따듯하게 시작해요

지담티 2023. 11. 8. 05:53
728x90

 

 

몇 해전. 동네를 아내와 드라이브하다 깊숙한 길 안쪽 찻집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주변하고 잘 어울리지 않는 검은 나무로만 지어진 2층짜리 목조 건물. 반질하게 잘 생긴 요즘 건물이 아니었다. 웅크리고 앉아 지나가는 이들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크고 검은 엄마 고양이 같았다. 먼지 폴폴 뒤집어쓴.

 

그렇게 우연하게 찾아 들어간 게 인연이 되어 지금껏 다니는 찻집이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꽃차 중심의 아기자기 예쁜 그런 찻집이 아니라 우직하고 뭉툭하지만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보이차 전문점이었다. 지하와 1층 그리고 다락방 같은 넓은 2층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면서도 닳아 있는 게 기분 좋은. 

 

그 2층에서는 한 달에 한번 콘서트가 열린다. 동네의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모여서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그리고 연주에 맞춰하는 떼창까지. 분위기는 7080부터 우리 부부까지. 어린 나훈아부터 이문세까지. 한 번은 열여덟 따님도 같이 가서 연말 콘서트를 오랫동안 마음껏 즐기다 온 적도 있다.     

 

그런데 그 찻집에 처음 들른 날. 주인 부부는 오랫동안 보고 지낸 듯 너무 편안했다. 특히 아내가 더욱. 지금은 아내가 먼저 갈까 하는 몇 안 되는, 다시 보고 싶은 사람들이 된 60대 중반의 부부다. 아내분은 직접 안무에 노래까지 하고, 남편분은 차 전문가다. 

 

온몸이 뜨끈해지면서 인중에 땀이 송글하게 맺히게 만들던 일명 벽돌차라고 했던 청전차. 그 차를 마시면서 그 맛과 향, 마주 앉아 급하지 않게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는 두 분이 참 편안하다고 느낀 건 나보다 아내가 더 그랬다. 지금도 종종 무심코 있다가 우리 갈까 하는 걸 보면. 

 

그런데 몇 번을 가면서 계속 내 눈에 콕 들어온 물견이 하나 있다. 바로 앉은자리에서 편리하게 계속 차 물을 끓여주는 시스템(?)이다. 차 끓이는 전용 주전자는 계속 알아서 물이 나온다. 끓인다. 식으면 알아서 또 덥혀준다. 끊어지지 않고 한번 우려낸 차 잎을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을 그 자리에 앉아서 즐길 수 있게. 

 

아내도 단박에 사고 싶어 했던 거다. 이런 기회 흔치 않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내가 처음으로 해외 직구를 해 구입한 물견이 도착했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는데, 사장님 말씀으로는 이 주전자는 중국에서만 만들어지는, 메이드인 차이나가 제일 좋은 물견중 하나라 신다. 우리나라는 아직 시장이 넓지 않아 직접 만들어 판매할 정도는 아니라 신다. 

 

 

 

 원리는 커피 포트에서 한참 진화(?)한 편의성을 갖추고 있다. 끓이기와 덥히기 기능이 기본인데, 사진에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우려낸 찻물을 다기에 담아 계속 따뜻하게 마실 수 있는 기능까지도 있다. 하얀색 물호스까지만 세트다. 아래 물통은 내가 직접 구입해다가 구멍을 뚫어 연결했다.

 

지금 글을 쓰는 이 공간. 키높이 책상 아래에 물통이 있다. 절반 정도 채워져 있다. 새벽에 일어나 안방에서 이곳으로 와서 제일 먼저 하는 게 바로 물 끓이기. 뾰옥 하면서 자그마한 기계음을 내면서 30초간 물을 끓어 올려 주전자에 자동으로 담는다. 그 30초가 노트북이 부팅되고 나도 부팅되는 시간이다. 

 

다시 30초 동안 물을 끓여 준다. 빨간색 엘이디 숫자판에 16도, 31도, 64도, 93도, 100도 하면서 숫자가 변한다. 그걸 내려다보면서 온몸 구석구석을 느낀다. 늘리고 당기고 돌리고. 나의 어제가 닫히고, 나만의 기대되는 오늘이 부팅되는 시간, 딱 60초다.

 

자, 오늘도 지금부터, 다시 한번, 좋았어. 그 신호를 나의 육체에 영혼에 불어넣기에는 너무나도 길고 깊고 충분한 60초다. 매일 아침 신성한 나의 시작을 유지할 수 있는 낮지만 강력한 기계음이 나를 흔들리게 충분하다. 지금껏 이 새벽을, 매일 쓰기를 유지할 수 있는 크나는 지분 중의 하나가 분명해졌다. 

 

주방에 있는 커피 포트와는 확연히 다르다. 오늘 이 새벽이 어제와 내일을 이어준다는 약속. 내 삶이 길게 뻗은 산줄기처럼 연속이라는 다짐. 급하지 않아도, 항상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 다시 내일 새벽을 기다린다는 설렘. 또 하루를 짙고 길게 또 만날 수 있다는 격한 행복. 

 

이 모든 것들이 이 새벽에 딸깍, 뾰옥, 촤아, 후아아아, 삑에 다 들어차 있다. 그렇게 한여름에도 따듯한 물을 한 모금, 두 모금, 한 컵 내 안에 부어준 게 벌써 몇 해다. 그렇게 출근 준비를 하기 전에 이미 나의 혈관을, 신경망을, 심장을 오늘 하루를 위해 미리 따듯하게 만들어 놓을 수 있어 참 좋다. 

 

오늘도 너무 뜨겁기만 하지 않게. 급하지 않게, 격하지 않게.  부드럽게 뜨듯하게.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