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사랑
7월 18-19일. 이틀간은 조카네에 머물렀다. 부탁받고 가져온 물건들을 전해주고, 시차 적응하느라 만들어 먹기 힘든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고 한 처형의 제안으로. 그래서 20일부터 이번주 목요일까지 약 3주간은 예약한 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 동네 10대들 - 특히 학생들 - 이 그렇듯 우리 남매들도 집안일 중 한 두 가지 자기 역할을 빼고는 다 나와 아내의 몫이었다. 특히, 아드님은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을, 따님은 설거지를 힘들어(?)했다.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게 현실적인 이유였지만. 그러던 아드님은 이모, 열 살 많은 이종 사촌 누나와 3년을 지내면서 우리 동네에서 보다 훨씬 가족의 일원으로 가져야 할 역할에 매우 익숙해져 있는 모습으로 확실히 변해 있었다.
20일 체크인한 후 오랜만에 우리 셋이 10평 남짓한 숙소에 모여 앉았다. 함께 있다는 반가움과 기쁨으로만 있는 나와 따님에게 아드님이 먼저 제안을 했다. 식사 당번을 정하자고. 사실 내 머릿속에서는 오랜만에 뭉친 남매를 위해 당연히 내가 해야지 하고 있었던 걸 아드님 제안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그런데 그 제안에는 식사 당번이 설거지, 음식물 처리까지 마무리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낯선(?) 아드님 덕에 아침, 점심, 저녁 담당을 정했다. 그렇게 첫째 주 아담(아침 담당)은 나, 점담은 따님, 저담은 아드님. 아침은 내 덕에 고추장 참치 찌개, 바삭 토스트, 라쟈냐, 김밥, 순두부찌개. 점담인 따님 덕에 카레, 누룽지, 피자, 달달 토스트, 햄버거. 저담인 아드님 덕에 계란말이, 치킨 뤱, 피시엔 칩스, 퓨전 햄버거 등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식사 준비와 관련된 이런 역할 분담 자체가 우리 동네에서 남매들이 함께 살 때는 없었다. 집안 청소할 때 자기 방 정리, 분리수거 정도의 역할 뿐이었다. 이 동네에 와서 따님이 그런다. 와, 엄마는 위대했다,라고. 매일 매끼를 매 순간 결정하고 만들어내는 행위 자체가 엄청나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몸으로 직접. 게다가 거의 대부분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만 만드는데 맛까지 있었다고. 그런데 아침, 점심보다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형이 한턱낸 웰컴 디너, 즈마야네 초대 파티, 즈마야네와 함께 간 피크닉, 우리끼리 한 드라이브 등에서 첫째 주 저녁은 두세 번을 먹고 들어왔다. 맥도널드에서 처형네에서 즈마야네에서. 그러다 보니 살짝 따님눈에 오빠가 먹고 노는 모습으로 보였나 보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따님은 삐쳐서 궁시렁 거리고 아드님은 뭐 어쩌라고의 입장으로 아싸를 외치는 뭐 그런 현실남매의 티격태격이었을 거다. 그런데 남매 서로가 매우 유쾌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성장한 모습들이어서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다. 모른 척하면서. 그런데 동생의 마음을 아드님도 눈치를 챘는가 보다. 저녁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그런다. 두 번째, 세 번째 주에 식사 담당을 바꾸는 게 어떻냐고. 따님도 에헤라 하는 눈치였고, 나는 그런 모습들이 그냥 좋아서 오케이. 그렇게 아담, 점담, 저담을 바꾸면서 현실 남매의 흔한 투닥거림 없이 잘 먹고 잘한다.
그런데 토요일 아침. 처형이 멈춰있던 앙트라제를 살려서 끌고 날 찾아왔다. 그 덕에 토요일 밴쿠버 아침. 스벅에서 모닝커피를 처형과 둘이서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커피마저도 내가 못 사게 하면서. 커피를 마시는 내내 처형은 3년 동안 아드님과의 이야기를 조곤 조곤 해주었다. 그 기간 동안 내가 알고 있던 행복보다 모르고 지나간 어려움이 더 많았다. 만 킬로가 넘게 낮밤을 반대로 떨어져 있던 사이에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언어와 동네의 낯설움, 코로나로 인한 단절, 아드님의 흔들림, 두 번의 교통사고, 초긍정 따님의 우울감 등이 겹치면서 결코 짧지 않은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아주 진하게, 얼기설기.
하기야 올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면서 나와 전화통화를 한 게 수십 시간이고, 주고받은 메시지가 얇은 책 한 권이 되겠다 싶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아드님에게 구체적인 역할을 주문하고, 유연하게 그 역할 수정을 통해 합리적인 생활 모습을 이모가 아닌 어른의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지시하고 시키는 게 아니라 항상 단호하게 부탁하기. 끊임없이 아이 컨텍하면서 대화나누기. 안아주기, 기대하고 있다고 알려주기. 기도하기. 그렇게 흔들림을 짧게 가지면서 아드님한테 신뢰와 믿음의 씨앗을 심어 놓은 것이다. 지금도 스스로 의심을 하지만, 원래 그런 조심성 있는 성격이라 익숙하다.
식사 당번 역할 수정을 먼저 제안할 때도, 아침을 준비하려고 스스로 일어날 때도, 그렇게 싫어하던 음식물 쓰레기를 나만큼 깔끔하게 정리할 때도,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마음을 천천히, 자세히 나에게 표현을 할 때도,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웃으면서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모습 속에서 어둑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뒷자리에 몸을 던지고 앉아 눈을 감아버리거나, 이내 졸기만 하던 아드님의 모습은 멀찌감치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독하다. 지독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뜨겁고 강하다. 자식은 그리 하지 못해도 부모는 당연하게 할 수 있다. 자식을 위해.
하지만 그 뜨겁고 강하고 독한 사랑을 자식의 정수리에 한꺼번에 쏟아부으면 자칫하면 자식이 타 죽을 수 있다. 자식만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그렇게 쏟아부은 부모도 기진맥진하게 된다. 더 많은 것들에 실망하게 된다. 더 좋은 것들을 탐닉하게 된다. 자기의 대체재로 여기게 된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랑은 조금씩 조금씩 여러 군데로 흘려보내야 한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알게 모르게. 자식이 스스로 그것이 가장 뜨겁고 강하고 소중했던 사랑이었다는 것을 아픔 속에서 시간 속에서 천천히 알아갈 수 있도록. 그 순간순간은 외면하고 싶은 고통이더라도. 그래서 자식은 평생 부모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